1. 영화 소개
'열차의 도착'은 1895년 프랑스의 발명가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영화입니다. 원 제목은 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로 '라 시오타 역에 도착한 기차'라는 뜻입니다. '라 시오타'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바닷가 마을입니다. 뤼미에르의 가족은 이곳을 휴양지로 자주 찾을 만큼 이 지역에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 시오타 역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라 시오타에 가면 뤼미에르 형제의 업적을 기리는 조형물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스토리가 없는 단순 기록영상으로 단 50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움직이는 이미지를 담아낸 영상화하는 초기 단계의 작품으로 영화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줄거리
러닝타임이 50초에 불과한 이 짧은 영화는 그저 라 시오타 역에 기차가 도착하는 장면만을 담고 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 영화를 촬영한 후 198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그랑 카페에서 관객에게 1프랑의 돈을 받고 이 작품을 상영합니다.(이 영화는 흥행하여 뤼미에르 형제는 몇 주 뒤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영화제작을 위한 다양한 기술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기에 영화에는 아무런 음향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는 상영장소에 피아노를 설치해 영상을 화면에 쏘는 동시에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기술적인 불완점함에도 불구하고 기차가 도착하는 영상을 본 관객들이 진짜 기차가 들어오는 줄 착각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도망쳤다는 유명한 일화는 이 영화가 당대에 굉장히 혁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재미있는 일화는 사실 당시의 사람들의 충격을 표현하기 위해 과장되었다는 글들이 많습니다.)
3. 뤼미에르 형제와 '시네마토그라프'
처음부터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뤼미에르 형제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사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대에 혁신적인 발명품이라 여겨지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기계를 접하게 된 후 영상촬영에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영상 촬영과 상영이 가능했지만 크기가 매우 컸으며 구멍 하나를 통해 순간적인 영상을 한 사람이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여러가지 한계가 있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는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여러 차례 키네토스코프를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한 결과 마침내 키네토스코프를 개량한 '시네마토그라프'를 발명하게 됩니다.
1895년 2월 13일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특허가 등록되었고 후에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라는 단어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에 비해 시네마토그라프는 크기가 작았으며 큰 벽면을 통해 많은 사람이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그랑 카페'에서의 성공적인 상영 이후 시네마토그라프는 유명해졌고 점점 흥행하여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아 수요가 급증하게 됩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1900년대 초가 되자 영화 사업에서 물러납니다. 지금은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고 ‘열차의 도착’을 비롯한 그들의 작품들이 영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당시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산업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합니다.
4. '열차의 도착'의 영화사적 의의
'열차의 도착'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인 영화로 보기 어렵습니다. 단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또 최초의 영화라는 타이틀이 있긴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 중 최초인 것도 아닙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영화는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입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열차의 도착'을 사람들에게 최초로 돈을 받고 상영을 했죠. 공간을 빌려 대중이 감상할 수 있는 상업적인 시스템을 시도한 점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높은 발명정신으로 끊임없는 실험을 거쳐 영상기인 시네마토그라피를 발명한 점도 이후 정식적인 스토리를 갖춘 영화들이 나올 수 있게 하는 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뤼미에르의 형제에 대해 남겨진 일화들 속에서 느껴지는 점은 그들이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영화의 신비함에 매료되어 시네마토그라피를 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화 사업에서 물러난 루이 뤼미에르는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 컬러 사진에 몰두하였고 오귀스트 뤼미에르는 의학 공부에 매진에 암에 대해 연구했다고 전해집니다. 가치있는 것,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찾아 파고드는 뤼미에르 형제가 있었기에 영화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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